민중당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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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중당 (1965년)은 1965년 5월, 제1야당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의 통합으로 창당된 제3공화국 최초의 통합 야당이다. 박순천이 대표최고위원을 맡았으나, 창당 직후 한일기본조약 비준과 베트남 전쟁 파병 문제로 당내 갈등이 발생했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끝에 1966년 신한당이 분당되었고, 이후 민중당은 1967년 신한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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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1965년)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국명 | 대한민국 |
정당명 | 민중당 |
창당일 | 1965년 5월 3일 |
해산일 | 1967년 2월 7일 |
해산 이유 | 신한당과 통합 신당 결성 때문 |
후계 정당 | 신민당 |
정치적 이념 및 입장 | 보수주의, 우익 |
추가 정보 | |
기관지 | 알 수 없음 |
상징 | 알 수 없음 |
국제 조직 | 알 수 없음 |
기타 | 알 수 없음 |
2. 창당 배경 및 과정
1960년대 대한민국은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 격변을 거치며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야권의 통합된 힘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특히, 한일기본조약 체결과 베트남 전쟁 파병 문제는 야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야권 통합 논의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민정당과 민주당의 통합 논의
1965년 5월 3일, 당시 국회 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이 통합하여 민중당이 결성되었다. 제3공화국 발족 후 첫 통합 야당으로, 대표최고위원(당수)에는 민주당 당수였던 박순천이 취임했다.[1] 그러나 창당 직후부터 한일기본조약 비준안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중시하는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2]2. 2. 창당대회 개최
1965년 6월 14일 민중당 창당대회에서는 박순천 전 민주당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한일회담 중단과 국민탄압 철회를 결의한 뒤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하였다.
민중당은 1965년 창당 직후부터 한일협정 반대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에서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과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간의 분열이 발생했다.[1]
전직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전 민정당 총재는 예상을 뒤엎고 낙선하여 고문으로 물러났다.[3] 이는 원내 48석의 민정당이 16석의 민주당에 흡수된 형태였기 때문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변이었다.[4] 진산파동 이후 윤보선과 대립각을 세웠던 유진산 계열의 대의원들이 박순천을 지원한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3. 주요 정책 및 활동
3. 1. 한일기본조약 반대 투쟁
1965년 8월 12일, 민중당 국회의원 61명은 한일기본조약 조인에 항의하며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했다.[1] 그러나 국회는 8월 14일 여당인 민주공화당 단독으로 한일기본조약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윤보선 등 강경파 의원들은 이에 반발하여 민중당을 탈당하고,[2] 1966년 3월 30일 신한당을 창당했다. 한편, 강경파를 제외한 민중당 의원들은 10월 14일 국회에 복귀했다.
3. 2. 베트남 전쟁 파병 반대
1965년 창당 직후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중시하는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과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1]
4. 당내 갈등과 분당
1965년 5월 3일 민중당 창당 직후부터 한일기본조약 비준안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1966년 3월 30일 강경파는 민중당을 탈당하고 신한당을 결성하여, 통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야당이 분열되었다.
1967년 5월에 치러질 제6대 대통령 선거의 대통령 후보로 민중당은 유진오를, 신한당은 윤보선을 지명했다. 이후 야권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및 야당 통합 추진 명분 아래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은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4. 1.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1965년 5월 3일, 국회 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이 통합하여 민중당이 결성되었다. 제3공화국 발족 후 첫 통합 야당으로, 대표최고위원(당수)에는 민주당 당수였던 박순천이 취임했다. 그러나 창당 직후부터 한일기본조약 비준안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중시하는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과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한일기본조약이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후 8월 12일, 민중당 국회의원 61명이 한일기본조약 조인에 항의하며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했지만,[1] 기본 조약 비준안은 8월 14일 여당인 민주공화당만의 단독 표결로 국회를 통과했다. 윤보선 등 최강경파 몇 명을 제외한 민중당 의원들은 10월 14일에 국회에 복귀했다. 이에 반발한 강경파는 민중당을 탈당하고[2] 다음 해 1966년 3월 30일 신한당을 결성했다.
4. 2. 신한당 창당
1966년 3월 30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민중당을 탈당하고[2] 신한당을 결성했다. 민중당 창당 직후부터 한일기본조약 비준안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중시하는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과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1965년 8월 12일, 민중당 국회의원 61명이 한일기본조약 조인에 항의하며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1]했지만, 기본 조약 비준안은 8월 14일 민주공화당만의 단독 표결로 국회를 통과했다. 윤보선 등 최강경파 몇 명을 제외한 민중당 의원들은 10월 14일 국회에 복귀했다. 이에 반발한 강경파는 결국 신한당을 창당하여, 통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야당이 분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5. 신민당과의 통합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에서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 및 야당 통합 논의가 이루어졌다.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면서 통합 야당이 다시 발족되었다.[2]
5. 1. 야권 통합 논의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에서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 및 야당 통합 논의가 이루어졌다.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면서 통합 야당이 다시 발족되었다.[2]5. 2. 신민당 창당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은 통합전당대회를 열고 양당 통합을 만장일치로 선언하였다. 당명은 신민당으로 결정되었으며, 당헌과 정강정책을 채택하고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윤보선 전 대통령, 대표위원에 유진오 고려대 전 총장을 추대했다.[1]1965년 5월 3일 창당된 민중당은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반대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윤보선 중심의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중시하는 유진산 중심의 온건파 간의 대립이었다.[1]
한일기본조약 조인에 항의하며 민중당 국회의원 61명이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했지만[1], 민주공화당 단독 표결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후 윤보선 등 강경파는 민중당을 탈당하고[2] 1966년 3월 30일 신한당을 결성하면서 야당은 분열되었다.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 및 야당 통합 추진 명분 아래,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은 다시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6. 역대 지도부
7. 역대 전당대회
1965년 6월 14일 민중당 창당대회에서는 박순천 전 민주당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한일회담 중단과 국민 탄압 철회를 결의한 뒤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하였다.[3] 윤보선 전 민정당 총재는 예상을 뒤엎고 낙선하여 고문으로 물러났는데, 이는 진산파동 이후 윤보선과 대립각을 세웠던 유진산 계열의 대의원들이 박순천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4]
1966년 7월 19일 신한당으로의 분당을 겪은 후 열린 민중당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회의 대신 운영회의를 최고집행기관으로 하도록 당헌을 개정하고, 박순천 대표를 운영회의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1966년 10월 22일 민중당 전당대회에서는 유진오 고려대 전 총장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이름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
유진오 | 872 | 83.2% | 대통령 후보 |
기타 | 176 | 16.8% | |
총투표수 | 1048 |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은 통합전당대회를 열고 양당 통합을 만장일치로 선언하며 당명을 신민당으로 결정하였다. 이후 당헌과 정강정책을 채택하고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에 윤보선 전 대통령, 대표위원에 유진오 고려대 전 총장을 추대했다.
8. 평가 및 의의
민중당은 1965년 제3공화국 발족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통합 야당이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정당과 제2야당이었던 민주당이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대표최고위원(당수)에는 박순천이 취임했다.[1]
그러나 창당 직후부터 한일기본조약 비준안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 방침을 놓고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구 민정당 계열의 윤보선 중심의 강경파와, 원내 투쟁을 중시하는 구 민주당 계열의 박순천과 유진산 중심의 온건파 간의 대립이 계속되었다.[1]
결국 1966년 강경파는 민중당을 탈당하고 신한당을 결성하면서 통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야당이 분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2] 이후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와 야당 통합 추진 명분 아래 민중당과 신한당은 다시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참조
[1]
뉴스
今日の歴史(8月12日)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2009-08-12
[2]
문서
당시의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국회의원은 정당에의 소속을 의무 지켜지고 있고, 소속 정당으로부터의 탈당은 의원 사직을 의미하고 있었다.
[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3권)
인물과사상사
2004
[4]
서적
야당 40년사
인간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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